[강연원고] 21世紀, 浄土思想의 時代的要請 - 강동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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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휴먼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2,956회 작성일 08-08-21 14:02본문
21世紀, 浄土思想의 時代的要請
대승불교실천연합 공동대표 강동균
緖論. 末法時代의 覺醒
이제 21세기가 웅장하게 그 막을 올렸다. 위기(危機)와 동란(動乱)의 세기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인생에 대한 깊은 의문과 불안에 휩싸이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말법시대(末法時代)를 맞이하고 있다. 가난과 실업에 대한 불안, 지진이나 태풍 등의 자연 재해에 아무런 대비책을 갖고 있지 못한 현실, 핵 무기를 비롯한 현대의 과학 무기들은 인간을 한 없이 위협하고 있으며, 오늘도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는 처참한 살육을 거듭하고 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자세히 알고 있다. 그 어떤 것도 현대의 문명 사회의 뿌리 깊은 불치병(不治病)의 모습을 여실(如実)하게 들어내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비인간적(非人間的)인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들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懐疑)와 절망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진지하면 진지할 수록 절망의 늪은 더욱 깊고 넓어진다. 인생의 목표나 인간의 가치는 단세포적인 흑백 논리에 지배되어, 한 조각의 행복이나 한 순간의 편안함마저도 앗아가 버린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망령(亡霊)에서 벗어나서, 진정 행복한 길은 없는지, 모두가 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지금 이 순간, 깊이깊이 성찰(省察)해야만 한다.
여기서 불교란 무엇이냐, 불교는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음미해야 할 역사적인 요청이 대두되는 것이다.
오늘은 먼저 불교의 기초적인 교리를 음미하면서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를 살피고, 그 대승의 내용이 바로 정토사상임을 밝히고자 한다.
1. 因果, 輪廻, 業에 대하여
부처님 당시에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인간의 가치는 모두가 바라문교에서 비롯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이 인과(因果), 윤회(輪廻), 그리고 업(業)에 대한 사상이다. 인과에는 어길 수 없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하나는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悪因悪果)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그것은 업(業)이 되어 윤회(輪廻)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어서 다음 생(生)에까지 이어진다. 금생(今生)은 전생(前生)의 업의 결과가 초래된 윤회의 결과라고 단념한다. 그리고 뻐긴다. 현대의 불교인들은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말씀을 상기해 보자.
부처님은 분명히 「윤회(輪廻)의 생(生)은 금생(今生)이 마지막이다」라고 매우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縁起)」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불교를 조금만 공부하면 배우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인과를 부정하시고 윤회를 부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법(因縁法)을 말씀하셨다. 물론 부처님은 인과법과 윤회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의 사회에 있어서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앞에서 말했던 인과법의 내용은, 선악(善悪)의 행위에는 반드시 거기에 해당하는 업보를 반드시 초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없다. 바라문은 바라문이기 때문에 모든 행위가 바라문에 입각한 선(善)으로 연결되어 다시 바라문으로 태어나게 되고, 노예는 노예로 태어났기 때문에 평생 노예로 살면서 모든 행위가 악(悪)으로 연결되어 다시 노예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悪因悪果)인 것이다. 불교는 그것을 인연법에 따라 선인낙과(善因樂果)요 악인고과(悪因苦果)라고 바꾼다. 고락(苦樂)은 선악(善悪)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선악에 자유롭다. 그래서 윤회를 하더라도 금생의 업보에 구속되지 아니한다. 그 뿐이 아니라 불교에서는 업보를 넘겨줄 수도 있고 넘겨받을 수도 있다고 하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것은 불교의 우수성을 증명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매우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유도하게 된다. 불교는 이것을 전의(転依)와 회향(廻向)이라고 부른다.
2. 轉依와 廻向
회향(廻向;parināma)이라고 하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공덕(功徳)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하며, 또 다른 하나는 공덕의 내용을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회향은 전의(転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먼저 회향의 첫 번째 의미를 살펴보자. 법화경(法華経)의 「보문품(普門品)」에서 무진의보살이 관세음보살에게 영락 목걸이를 공양하면서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 공양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보시의 공덕이 모든 중생에게 회향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승단(僧団)에 보시한 공덕이 기아(飢餓)에 시달리고 있는 아귀(餓鬼)에게 베풀어지기를 바라는 경전도 있다. 이렇게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공덕이 넘겨지는 것이 회향의 첫 번째 의미이다.
회향의 두 번째 의미는 내용의 전환을 시키는 회향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이 완성되면 열반이 성취된다. 그것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禅定) 등의 세간적(世間的)인 행위가 지혜의 완성이라고 하는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로 전환된다는 말이다.. 세간적인 행위가 출세간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회향되는 것은 대승경전(大乗経典)에는 당연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 근거로 전의(転依)의 사상이 도입된다. 전의의 사상이 최고조로 응결된 것이 본원(本願)이다.
3. 本願의 意味
인간이 행복해지고 싶다. 자유를 획득하고 싶다고 하는 바램(願)은 근원적인 것이며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바램이 성취될 수 없는 상태의 어리석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진실한 의미의 행복과 자유란 시간과 공간의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떠나서는 사유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삼독번뇌(三毒煩惱)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인간존재가 내 자신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한히 묻고(問) 묻는 과정에서 생기는 절망과 좌절은 결국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량수경의 앞부분에서는 그 과정마저도 여래의 위력(威力)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무량수경에서 아난다가 붓다께서 5종의 서상(瑞相)이 현현(顯現)함을 밝혔고, 붓다도 그것을 긍정하지만, 그 뒤에 여래의 출세(出世)의 의의와, 자비와 지혜의 무한함을 강조한 다음에 아래와 같이 여래의 위력을 표현하고 있다.
여래에게 그 뜻을 묻고자 하였던 그것도 실은 여래의 뜻(Tathāgatasya-aṇubhāva= 여래의 위력(威力)인 것이다.
이것은 아난다라고 하는 인간의 지혜로움은 아난다라는 인간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뜻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고뇌를 통해서 묻고 묻는 과정마저 자력으로 비롯됨이 아니라고 부정되어진다면,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여래의 위력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여래의 위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아난다를 위하여 법장보살의 발원(發願)과 수행을 전개하여 가는 것이 바로 무량수경인 것이다.
앞에서 아난다는 자기 자신의 지혜로움을 앞세우다가 좌절했지만, 법장보살은 결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다. 법장보살은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앞에서 불국청정장엄무량묘토(佛國淸淨莊嚴無量妙土)를 가르쳐 보여 줄 것을 간절하게 말씀 드리자, 여래는 「네 스스로도 잘 알텐데 왜 묻느냐」라고 하였고, 법장보살은 「제가 알 수 있는 경계(境界)가 아니니 바라옵건대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스스로 어리석은 인간임을 여실(如實)하게 밝혔다. 바로 이것이 「救濟의 기연(機緣)」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48원은 이러한 구제의 기연, 바꿔 말해서 「정토왕생의 기연」의 현현(顯現)이며 여래대비심(如來大悲心)의 발로이다.
법장보살은 5겁(劫)동안 사유하고 발원(發願)하였으며, 그 원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불가사의조재영겁(不可思議兆載永劫) 동안의 무량덕행(無量德行)을 적식(積植)하였다. 그리고 성취하였다. 성취한 원(願)은 세상을 초월한 원이며, 그것은 대비의 원이다. 무량수경의 「중서게(重誓偈)」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내 세상을 초월한 원을 세워 반드시 무상도(無上道)에 이르리라. 이 원이 원만구족(圓滿具足)되지 않는다면 맹세코 정각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내 무량겁(無量劫)을 통하여 대시주(大施主)가 되어서 두루 모든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못한다면 맹세코 정각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내가 불도를 성취함에 이르러 그 명성이 시방을 넘어 서리라. 마침내 듣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맹세코 정각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그 앞에서 서술한 48원의 내용에 대한 면밀한 재확인이다. 48원은 모두가 「설령 내가 부처가 되더라도(設我得佛), ······ 정각을 이루지 않으리라(不取正覺)」이라는 정형(定型)의 게송(偈頌)으로 되어 있다. 「설아득불」 이하의 문장은 「원(願)」이며, 「불취정각」은 「서(誓)」이다. 법장보살은 정각(正覺)을 이루었고, 그의 48원은 성취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확신」할 때에 「극락」은 눈앞에 있는 것이다.
미타의 본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믿고 신앙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무량수경에서는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여 잊지 아니하는 것은 어려움 중의 어려움이요, 이 어려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아미타경에서도 「이 법(法)을 믿기란 지극히 어렵다」고 하였다. 「여래가 세상에 나타 날 때(出世)에 같은 세상에 나 역시 나기(出世) 어렵고, 여래를 보기도 어려우며, 모든 부처님의(諸佛)의 진실한 가르침(經道)은 듣기 어렵다(難得難聞). 또 보살의 가장 뛰어난(殊勝) 법·모든 바라밀(波羅蜜)도 또한 듣기 어렵다. 선지식을 만나 법을 듣고(聞法) 실천하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다」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 믿고 신앙한다는 종교심의 발로를 재촉하고, 그 근거를 본원(本願)은 제시해 주고 있다.
본원사상은 석존에 의해서 자각된 자비와 지혜가 바탕이 된 여래의 대비심(大悲心)이 아미타불의 본원이라는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고 표현된 것이다. 그것이 여래의 대비심의 발로라고 한다면, 인간은 단지 여래의 본원에 의지하기만 하면 구제되는 것이다. 여기서 구제되는 인(因)마저도 중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래에게 있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을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왕생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힘으로> 능히 그 정보장엄(正報莊嚴)을 감득(感得)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 의보정토(依報淨土)를 감득(感得)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여래의 본원력(本願力)의 <능동적인 묘용(妙用)으로> 인하여 비로소 수감수용(隨感受用)되는 것이다. <결코> 자업인력(自業因力)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無量壽經宗要)
본원이란 중생이 좌절의 밑바탕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순수생명이며 절대가치이다. 진리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중생이, 그를 「섭취불사(攝取不捨)」하겠다는 여래의 본원(=약속)을 믿고 의지할 때에, 거기에 본원의 의의는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며, 정토왕생의 근거도 명시되어지는 것이다.
이상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대승불교사상은 바로 정토사상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南無阿彌陀佛
현대의 우리들에게 모자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꿔 말해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생명을 주는 한이 있어도 획득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학자들은 그것을 가치(価値)라고 한다. 우리들에게 절대가치란 무엇일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의 역사상 언제나 종교가 담당해 왔으며, 지금도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그 종교는 세간을 대상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가르침이 세속화되어야 한다. 결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고답적인 것이 되어서도 아니 되며, 신비화해서도 아니 된다. 세대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고, 지역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고, 인간의 유형에 따라 가치관이 다른 현대는 분명히 뭔가가 잘못 되어 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절대가치인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가치관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종교를 성찰하고 불교를 성찰할 때, 과연 불변의 가치관을 제공해 주고 있는가, 라고 반성하게 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상이다. 종교란 인간의 마음을 떠받쳐 주는 정신적인 지주이어야 하며, 절대적인 가치관이어야 한다는 이론을 끌어들인다면, 그 역할을 불교가 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은 불자라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사후(死後)의 세계에 관하여 분명한 제시가 종교적인 측면에서 되어지지 않는다면 달리 인간의 생존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겸허하게 인간존재를 성찰할 때,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는 절대고(絶對苦)가 또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직관하지 않을 수 없다. 고(苦)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죽음에 대한 苦는 말과 글을 넘어 서서 엄연한 사실로서 현전(現前)한다. 모든 동물가운데에서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일 뿐이다. 그래도 인간이 죽음의 공포에서 견디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했던 모든 행위와 사고방식이 육체적인 죽음으로 완전히 소멸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논리가 성립한다면 인간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와해돼 버린다.
불교는,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발보리심(發菩提心)하여 보살의 길을 가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대승경전은 이 보살행이 바탕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가기욕(捨家棄欲)하고, 난행(難行)을 능행(能行)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특히 현대라고 하는 사회적인 제약을 받는 인간은 그것을 실천할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차생(此生)에도 어렵지만 내생(來生)이라 하더라도 자신할 수는 없다.
염불신앙(念佛信仰)의 의의는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차생(此生)이 고해(苦海)다 하더라도 차생을 버리고 내생에 가고 싶다고 하는 인간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씀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가치관의 획득이다. 고해(苦海)의 차생(此生)에서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마디, 또 그로 인해서 죽음의 공포마저 물리칠 수 있는 단 한 마디의 말씀, 그것은 「부처님,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말이다.
여래(如來)의 대비원력(大悲願力)을 믿고 의지하여 환희심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가치기준이 퇴락해 버린 현대의 「나」에게 확신할 수 있는 가치관이 제공 되어지는 것이다. 단 한 마디 「부처님,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며, 염불왕생(念佛往生)이 기약된 인간만이 자신 있게 뛰어 들 수 있는 진실 신앙의 세계인 것이다.
結論.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미타불(阿弥陀仏), 극락(極樂), 염불(念仏) 등의 말들이 지금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들의 생활 감정 안에 얼마만큼 깊이 침투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종교적인 생활과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소리 높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대승불교실천연합에서 다 같이 소리 높여 「21세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저마다의 입장에서 다각적으로 고심하고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을 긋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되어진다. 오늘의 성과는 매우 뜻 깊은 것이며, 이것은 대승불교실천연합 회원만의 것이 아니라 널리 한국인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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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불교실천연합 공동대표 강동균
緖論. 末法時代의 覺醒
이제 21세기가 웅장하게 그 막을 올렸다. 위기(危機)와 동란(動乱)의 세기라고 일컬어지는 현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인생에 대한 깊은 의문과 불안에 휩싸이면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말법시대(末法時代)를 맞이하고 있다. 가난과 실업에 대한 불안, 지진이나 태풍 등의 자연 재해에 아무런 대비책을 갖고 있지 못한 현실, 핵 무기를 비롯한 현대의 과학 무기들은 인간을 한 없이 위협하고 있으며, 오늘도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는 처참한 살육을 거듭하고 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자세히 알고 있다. 그 어떤 것도 현대의 문명 사회의 뿌리 깊은 불치병(不治病)의 모습을 여실(如実)하게 들어내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비인간적(非人間的)인 현실을 직시하면서, 우리들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懐疑)와 절망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진지하면 진지할 수록 절망의 늪은 더욱 깊고 넓어진다. 인생의 목표나 인간의 가치는 단세포적인 흑백 논리에 지배되어, 한 조각의 행복이나 한 순간의 편안함마저도 앗아가 버린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런 망령(亡霊)에서 벗어나서, 진정 행복한 길은 없는지, 모두가 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없는지, 지금 이 순간, 깊이깊이 성찰(省察)해야만 한다.
여기서 불교란 무엇이냐, 불교는 어떤 길을 제시하고 있는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시 음미해야 할 역사적인 요청이 대두되는 것이다.
오늘은 먼저 불교의 기초적인 교리를 음미하면서 대승불교의 가르침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이유를 살피고, 그 대승의 내용이 바로 정토사상임을 밝히고자 한다.
1. 因果, 輪廻, 業에 대하여
부처님 당시에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인간의 가치는 모두가 바라문교에서 비롯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이 인과(因果), 윤회(輪廻), 그리고 업(業)에 대한 사상이다. 인과에는 어길 수 없는 두 가지 철칙이 있다. 하나는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悪因悪果)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그것은 업(業)이 되어 윤회(輪廻)하게 되는 원동력이 되어서 다음 생(生)에까지 이어진다. 금생(今生)은 전생(前生)의 업의 결과가 초래된 윤회의 결과라고 단념한다. 그리고 뻐긴다. 현대의 불교인들은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말씀을 상기해 보자.
부처님은 분명히 「윤회(輪廻)의 생(生)은 금생(今生)이 마지막이다」라고 매우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은 「연기(縁起)」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불교를 조금만 공부하면 배우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교리이다. 부처님은 분명히 인과를 부정하시고 윤회를 부정하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인연법(因縁法)을 말씀하셨다. 물론 부처님은 인과법과 윤회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의 사회에 있어서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부정하지 않았을 뿐이지,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앞에서 말했던 인과법의 내용은, 선악(善悪)의 행위에는 반드시 거기에 해당하는 업보를 반드시 초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없다. 바라문은 바라문이기 때문에 모든 행위가 바라문에 입각한 선(善)으로 연결되어 다시 바라문으로 태어나게 되고, 노예는 노예로 태어났기 때문에 평생 노예로 살면서 모든 행위가 악(悪)으로 연결되어 다시 노예로 태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悪因悪果)인 것이다. 불교는 그것을 인연법에 따라 선인낙과(善因樂果)요 악인고과(悪因苦果)라고 바꾼다. 고락(苦樂)은 선악(善悪)의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선악에 자유롭다. 그래서 윤회를 하더라도 금생의 업보에 구속되지 아니한다. 그 뿐이 아니라 불교에서는 업보를 넘겨줄 수도 있고 넘겨받을 수도 있다고 하는 개념을 도입했다. 이것은 불교의 우수성을 증명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매우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유도하게 된다. 불교는 이것을 전의(転依)와 회향(廻向)이라고 부른다.
2. 轉依와 廻向
회향(廻向;parināma)이라고 하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공덕(功徳)을 타인에게 넘겨주는 것을 의미하며, 또 다른 하나는 공덕의 내용을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회향은 전의(転依)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먼저 회향의 첫 번째 의미를 살펴보자. 법화경(法華経)의 「보문품(普門品)」에서 무진의보살이 관세음보살에게 영락 목걸이를 공양하면서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 공양을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보시의 공덕이 모든 중생에게 회향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승단(僧団)에 보시한 공덕이 기아(飢餓)에 시달리고 있는 아귀(餓鬼)에게 베풀어지기를 바라는 경전도 있다. 이렇게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공덕이 넘겨지는 것이 회향의 첫 번째 의미이다.
회향의 두 번째 의미는 내용의 전환을 시키는 회향이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수행이 완성되면 열반이 성취된다. 그것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禅定) 등의 세간적(世間的)인 행위가 지혜의 완성이라고 하는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로 전환된다는 말이다.. 세간적인 행위가 출세간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회향되는 것은 대승경전(大乗経典)에는 당연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그 근거로 전의(転依)의 사상이 도입된다. 전의의 사상이 최고조로 응결된 것이 본원(本願)이다.
3. 本願의 意味
인간이 행복해지고 싶다. 자유를 획득하고 싶다고 하는 바램(願)은 근원적인 것이며 순수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바램이 성취될 수 없는 상태의 어리석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진실한 의미의 행복과 자유란 시간과 공간의의 제한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인간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떠나서는 사유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삼독번뇌(三毒煩惱)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인간존재가 내 자신의 고뇌를 해결하기 위하여 무한히 묻고(問) 묻는 과정에서 생기는 절망과 좌절은 결국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확인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량수경의 앞부분에서는 그 과정마저도 여래의 위력(威力)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무량수경에서 아난다가 붓다께서 5종의 서상(瑞相)이 현현(顯現)함을 밝혔고, 붓다도 그것을 긍정하지만, 그 뒤에 여래의 출세(出世)의 의의와, 자비와 지혜의 무한함을 강조한 다음에 아래와 같이 여래의 위력을 표현하고 있다.
여래에게 그 뜻을 묻고자 하였던 그것도 실은 여래의 뜻(Tathāgatasya-aṇubhāva= 여래의 위력(威力)인 것이다.
이것은 아난다라고 하는 인간의 지혜로움은 아난다라는 인간자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뜻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이다. 자신의 고뇌를 통해서 묻고 묻는 과정마저 자력으로 비롯됨이 아니라고 부정되어진다면, 이제 남은 것은 오로지 여래의 위력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여래의 위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아난다를 위하여 법장보살의 발원(發願)과 수행을 전개하여 가는 것이 바로 무량수경인 것이다.
앞에서 아난다는 자기 자신의 지혜로움을 앞세우다가 좌절했지만, 법장보살은 결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다. 법장보살은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앞에서 불국청정장엄무량묘토(佛國淸淨莊嚴無量妙土)를 가르쳐 보여 줄 것을 간절하게 말씀 드리자, 여래는 「네 스스로도 잘 알텐데 왜 묻느냐」라고 하였고, 법장보살은 「제가 알 수 있는 경계(境界)가 아니니 바라옵건대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스스로 어리석은 인간임을 여실(如實)하게 밝혔다. 바로 이것이 「救濟의 기연(機緣)」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48원은 이러한 구제의 기연, 바꿔 말해서 「정토왕생의 기연」의 현현(顯現)이며 여래대비심(如來大悲心)의 발로이다.
법장보살은 5겁(劫)동안 사유하고 발원(發願)하였으며, 그 원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불가사의조재영겁(不可思議兆載永劫) 동안의 무량덕행(無量德行)을 적식(積植)하였다. 그리고 성취하였다. 성취한 원(願)은 세상을 초월한 원이며, 그것은 대비의 원이다. 무량수경의 「중서게(重誓偈)」의 첫머리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내 세상을 초월한 원을 세워 반드시 무상도(無上道)에 이르리라. 이 원이 원만구족(圓滿具足)되지 않는다면 맹세코 정각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내 무량겁(無量劫)을 통하여 대시주(大施主)가 되어서 두루 모든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못한다면 맹세코 정각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내가 불도를 성취함에 이르러 그 명성이 시방을 넘어 서리라. 마침내 듣지 못하는 곳이 있다면 맹세코 정각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그 앞에서 서술한 48원의 내용에 대한 면밀한 재확인이다. 48원은 모두가 「설령 내가 부처가 되더라도(設我得佛), ······ 정각을 이루지 않으리라(不取正覺)」이라는 정형(定型)의 게송(偈頌)으로 되어 있다. 「설아득불」 이하의 문장은 「원(願)」이며, 「불취정각」은 「서(誓)」이다. 법장보살은 정각(正覺)을 이루었고, 그의 48원은 성취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확신」할 때에 「극락」은 눈앞에 있는 것이다.
미타의 본원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믿고 신앙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무량수경에서는 그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여 잊지 아니하는 것은 어려움 중의 어려움이요, 이 어려움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아미타경에서도 「이 법(法)을 믿기란 지극히 어렵다」고 하였다. 「여래가 세상에 나타 날 때(出世)에 같은 세상에 나 역시 나기(出世) 어렵고, 여래를 보기도 어려우며, 모든 부처님의(諸佛)의 진실한 가르침(經道)은 듣기 어렵다(難得難聞). 또 보살의 가장 뛰어난(殊勝) 법·모든 바라밀(波羅蜜)도 또한 듣기 어렵다. 선지식을 만나 법을 듣고(聞法) 실천하는 것 또한 어려운 것이다」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 믿고 신앙한다는 종교심의 발로를 재촉하고, 그 근거를 본원(本願)은 제시해 주고 있다.
본원사상은 석존에 의해서 자각된 자비와 지혜가 바탕이 된 여래의 대비심(大悲心)이 아미타불의 본원이라는 구체적인 모양을 갖추고 표현된 것이다. 그것이 여래의 대비심의 발로라고 한다면, 인간은 단지 여래의 본원에 의지하기만 하면 구제되는 것이다. 여기서 구제되는 인(因)마저도 중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래에게 있는 것임을 알아야만 한다. 그것을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릇 왕생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힘으로> 능히 그 정보장엄(正報莊嚴)을 감득(感得)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그 의보정토(依報淨土)를 감득(感得)할 수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여래의 본원력(本願力)의 <능동적인 묘용(妙用)으로> 인하여 비로소 수감수용(隨感受用)되는 것이다. <결코> 자업인력(自業因力)으로 성취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無量壽經宗要)
본원이란 중생이 좌절의 밑바탕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순수생명이며 절대가치이다. 진리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중생이, 그를 「섭취불사(攝取不捨)」하겠다는 여래의 본원(=약속)을 믿고 의지할 때에, 거기에 본원의 의의는 뚜렷이 나타나는 것이며, 정토왕생의 근거도 명시되어지는 것이다.
이상을 한 마디로 정리한다면, 대승불교사상은 바로 정토사상일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南無阿彌陀佛
현대의 우리들에게 모자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꿔 말해서,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생명을 주는 한이 있어도 획득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학자들은 그것을 가치(価値)라고 한다. 우리들에게 절대가치란 무엇일까?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인류의 역사상 언제나 종교가 담당해 왔으며, 지금도 그래야만 한다. 그리고 그 종교는 세간을 대상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가르침이 세속화되어야 한다. 결코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고답적인 것이 되어서도 아니 되며, 신비화해서도 아니 된다. 세대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고, 지역에 따라 가치관이 다르고, 인간의 유형에 따라 가치관이 다른 현대는 분명히 뭔가가 잘못 되어 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절대가치인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가치관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종교를 성찰하고 불교를 성찰할 때, 과연 불변의 가치관을 제공해 주고 있는가, 라고 반성하게 하는 것이 작금의 사회상이다. 종교란 인간의 마음을 떠받쳐 주는 정신적인 지주이어야 하며, 절대적인 가치관이어야 한다는 이론을 끌어들인다면, 그 역할을 불교가 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은 불자라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사후(死後)의 세계에 관하여 분명한 제시가 종교적인 측면에서 되어지지 않는다면 달리 인간의 생존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보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겸허하게 인간존재를 성찰할 때,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하는 절대고(絶對苦)가 또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직관하지 않을 수 없다. 고(苦)는 여러 가지로 설명되어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죽음에 대한 苦는 말과 글을 넘어 서서 엄연한 사실로서 현전(現前)한다. 모든 동물가운데에서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일 뿐이다. 그래도 인간이 죽음의 공포에서 견디어 나갈 수 있는 것은 죽음의 순간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했던 모든 행위와 사고방식이 육체적인 죽음으로 완전히 소멸한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논리가 성립한다면 인간의 가치관은 근본적으로 와해돼 버린다.
불교는, 특히 대승불교에서는 발보리심(發菩提心)하여 보살의 길을 가는 것을 이상으로 하고 있다. 모든 대승경전은 이 보살행이 바탕이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사가기욕(捨家棄欲)하고, 난행(難行)을 능행(能行)하는 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은, 특히 현대라고 하는 사회적인 제약을 받는 인간은 그것을 실천할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 차생(此生)에도 어렵지만 내생(來生)이라 하더라도 자신할 수는 없다.
염불신앙(念佛信仰)의 의의는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차생(此生)이 고해(苦海)다 하더라도 차생을 버리고 내생에 가고 싶다고 하는 인간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나의 모든 것을 의탁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씀과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가치관의 획득이다. 고해(苦海)의 차생(此生)에서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마디, 또 그로 인해서 죽음의 공포마저 물리칠 수 있는 단 한 마디의 말씀, 그것은 「부처님,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말이다.
여래(如來)의 대비원력(大悲願力)을 믿고 의지하여 환희심을 낼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가치기준이 퇴락해 버린 현대의 「나」에게 확신할 수 있는 가치관이 제공 되어지는 것이다. 단 한 마디 「부처님, 고맙습니다!」라고 하는 말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며, 염불왕생(念佛往生)이 기약된 인간만이 자신 있게 뛰어 들 수 있는 진실 신앙의 세계인 것이다.
結論.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미타불(阿弥陀仏), 극락(極樂), 염불(念仏) 등의 말들이 지금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들의 생활 감정 안에 얼마만큼 깊이 침투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종교적인 생활과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무런 의미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소리 높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오늘, 한국대승불교실천연합에서 다 같이 소리 높여 「21세기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저마다의 입장에서 다각적으로 고심하고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될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획을 긋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생각되어진다. 오늘의 성과는 매우 뜻 깊은 것이며, 이것은 대승불교실천연합 회원만의 것이 아니라 널리 한국인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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