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모차르트가 35세인 1791년에 입적하였을 때 작곡가인 하이든은 “앞으로 한 세기 정도는 이와 같은 천재는 못 볼 것이다.”라는 추모사를 썼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버지에게 약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우리나라로 치면 유치원시절 쯤에 피아노용 미뉴에트를 작곡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성인이 될수록 작곡 및 피아노 연주는 무르익어 갔으며 ‘천상의 선율을 오선지에 척척 옮겨 놓는 음악의 여래사’가 되었다.
오죽하였으면 ‘천상으로부터 온 작곡가’, ‘신의 사자’라는 애칭을 얻었겠는가? 우리가 그를 ‘천상으로부터 온 손님’이라고 느껴준다면 음악의 불성(佛性)에 한층 더 다가서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예술적인 테크닉을 스스로 터득하고 연습하였으며, 악식론에 집착하지 않아 관객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낭만주의 음악이라는 이미지와 더불어 암담한 현실을 ‘천상의 울림’이라는 클래식 미학으로 승화했던 것이다. 필자는 모차르트를 공부하던 시절 다른 작곡가들에게서 느끼지 못하는 한층 높은 천재성을 그에게서 발견할 때 마다 홀로 운 적이 많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는 음악의 모든 범주가 자유였으며 천상의 소리를 듣고 그대로 옮김과 동시에 즉석으로 연주가 되었으며 그의 모든 작곡표현기법은 영적으로 체험된 것을 표현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작곡가 호프만은 “하이든의 음악은 어린아이와 같은 투명한 마음의 표현이며 인간적인 소재를 평범한 삶 속에서 낭만으로 다룬다”라고 하면서도 “모차르트의 음악은 무한한 존재의 예감·초인간적인 존재·영적인 삶 속에서 자라나는 기적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음악가들은 베토벤을 통해 높은 이상과 영웅적인 정신을 표현한 데 반해, 모차르트를 통해서는 순화된 보편성을 찾으려 했다. 아무리 음악의 천재라도 사회성은 문제가 많았다. 그의 후원자는 안타까운 나머지 “모차르트가 사회인으로 잘 살려면 지금보다 세상물정을 2배는 더 알아야하고, 음악적 수준은 현재의 절반이 되더라도 천재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모차르트는 음악에 집중하여 작곡에 빠지면 다른 감각은 없어지는 사람이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음악창작과 피아노연주 및 지휘만 하였다. 그는 다른 음악가들처럼 사회현실에 절충하지 않았다. 오로지 완전한 자유를 외치는 음악가였으며 귀족이나 왕에게 복종이나 예속을 당하지 않으려 노력하였다. 그 결과 모차르트에게는 가난이 대가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래도 그는 음악활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다시 말해 임제록에 있는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삶을 실천한 셈이다. 모차르트가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였기에 주위의 시선과 현실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음악가의 길만 갈 수 있었다. 더불어 그는 자신의 죽어가는 음악인생을 윤회적인 친구로 승화시켰다. 또한 모차르트는 병상에 있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죽음에 관한 편지를 이렇게 썼다.
“죽음이란 그 자체를 친구처럼 가깝게 생각한다면, 우리 존재의 참다운 목표가 죽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최근 몇 년 동안에 인간의 가장 좋은, 가장 진실한 친구인 이 죽음과 대단히 가까운 사이가 되었습니다. 죽음의 스크린은 제겐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니라 친근한 이웃이며 한 잔의 위스키와도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가난과 대중의 몰이해 속에서 죽어간 ‘천상의 손님’이었던 것이다.
sangmoo108@hanmail.net
상무 스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부산여자대학교 음악과 강사
995호 [2009년 04월 21일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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